Hyung-Geun Park
Artist, Photographer
사진의 시간
“그러나 카메라 렌즈는 현재를 전혀 염려하지 않는다. 그곳은 현재이고자 할 필요가 없으며, 현재가 아닐 수도 없다. 그것은 기억도 계산도 없이 현재한다.”
- 자크 랑시에르 1)
시간 밖의 사진
사진으로 찍힌 대상은 필연적으로 과거를 대신한다. 그래서 사진은 기억과 연결된다. 이 같은 사진술은 역설적으로 한 방향으로 향하는 시간의 성질을 전복한다. 오로지 기억으로만 존재해야 할 과거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기억의 순간과 박제된 기억은 자주 불일치된다. 사진의 힘은 불일치에 있을 것이다. 박형근 사진의 근간을 이루는 시간에 대한 물음은 사진술의 기계성과 기계가 만들어내는 기억술을 충돌시켜 “기억의 현존”을 질문한다. 여기서 자연은 그 오랜 시간의 기억을 품고 있는 미스테리한 존재가 된다. 동시대는 자신의 일상이 끊임없이 기록되고 보존되는 시대이다. 동시대란 모호한 시간 개념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사진술은 우리의 삶을 정확한 시간과 장소에 근거하여 기록한다. 박형근의 시간 밖의 시간은 곧 장소-없음으로 이어진다. 물론 자주 제주도의 자연과 숲을 대상으로 삼아 작업을 진행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는 무관한 얘기다. 그가 기록한 제주도의 정경은 미디어에 등장하는 제주도의 상투성에서 벗어나 있다. 그는 특이하게도 풍경의 안과 밖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작가다. 웅장한 대자연의 실루엣과 숲 어딘가에서 발견된 동물 사체가 공존하듯 자연이란 생명의 에너지가 용출될 때 그 내부 어딘가에 놓인 동물 두개골을 발견할 수 있다. 마치 고전회화의 바니타스가 품은 알레고리를 연상시키듯 그의 사진은 자연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이 한 화면 안에 교차된다.
박형근의 사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시간성’은 계절과 기후, 공기의 흐름과 빛의 강도에 의해서도 포착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 시간성의 기제들이 전혀 자신을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A Bulb(2010)은 여름 풍경 사진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전경에 숲이 일종의 프레임의 기능을 갖는다. 화면 하단에는 화려한 꽃다발이 놓여있고 상단에는 나뭇가지에 매달린 전구 하나가 있다. 초현실주의적 위장은 자연의 풍경이 담아낸 여름의 생동감보다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잠복한 것처럼 보인다. Last Summer(2009) 에서도 계절은 명시되지만 그 시간성은 모호하다. 박형근은 풍경 내부에 우회적으로 개입한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결과적으로 자연을 인위적으로 생산한다는 ‘풍경의 진실’을 알려주는 또 다른 알레고리일 것이다. 사진을 관통하며 나타나는 낭만주의적 분위기는 영속의 시간을 바라지만 결국 유한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불일치와 접속한다. 라파엘 전파의 복거주의 사상처럼 자연과 인간, 자연과 예술, 영속한 것과 자연을 재현한 과학문명 간의 운명적 굴레가 그의 사진의 배면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Tenseless(시제가 모호한)는 문화적으로 의례와 자연에 대한 주술적 믿음이 사라진 시대의 반응에 가깝다. Tenseless-79, Fallen(2015)의 추락한 비둘기와 주변의 이름 모를 꽃들, Broken Gravity-5(2015)의 이질적인 느낌으로 재현된 우주는 이념과 이상이 사라진 이후 이미 개념적으로는 정복된 지구 너머의 세계를 애도하는 멜랑콜리아와 다름없다. 박형근의 사진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가 재현한 세계는 따뜻하고 정감어린 풍경이라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을씨년스러운 장면들이다.Flashhook-34(2013-2016)는 산불 연기에 도피하는 새들을 볼 수 있다. 투명한 주황색으로 피어오른 연기는 마치 물에 풀린 핏물처럼 대기를 물들이고 불에 타들어가는 나무들의 실루엣은 처절하다. 박형근의 사진 전반에 흐르는 탐미적 관조와 기이한 낯섦은 바로 작가가 보는 자연의 현실이자, 매스미디어가 포착할 수 없는 관조이기도 하다.
사진의 시간
작가는 내게 최근에는 장노출 사진을 주로 찍는다고 전했다. 장노출이야말로 고유한 사진술의 영역으로 시간의 과정을 품은 이미지의 탄생을 통해 이미지와 시간 사이의 불가분의 관계를 증명한다. 수기모토의 장노출이 존재의 추상성을 드러냈다면 김아타는 차이 없는 존재의 공통성을 드러내려 했다. 반면 박형근은 기계의 시선으로 사진의 고유성을 찾고자 한다. 구체적인 시간성 대신 추상적인 시간의 길이를 정하지 않고 그 기간 동안 사진은 스스로 세계를 기록하고 그동안 작가는 자신만의 활동에 몰입한다. 주로 독서나 음악 감상을 한다. 독서를 마친 뒤 사진의 시간은 멈추고 작가는 이후 독서의 시간 동안 일어난 대기의 움직임, 온도와 조도의 변화도 발견할 수 있다. 간혹 작가의 모습이 사진의 시간 안에 기입될 때도 있지만 비가시적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서 지워졌거나 잊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언하기는 어렵다는 또 다른 진리를 일깨운다. 조금 더 해석을 확장하자면, 사진의 시간은 동시대 우리의 일상을 비유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감시와 통제가 일어나는 관찰의 시대인 투명사회에서 카메라는 세상을 보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처럼 도시 네트워크에 촘촘히 박힌 카메라는 모든 것을 기록하되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그 기록은 곧바로 휴지통에 비워질 운명이다. 비가시적인 존재는 인류를 대표하는 가장 보통의 존재들일 것이다. 자크 랑시에르는 이미지로 재현된 역사를 예를 들어 그 속엔 특권층부터 가장 소외된 자들까지 포함되었지만 실제론 그들 사이에서의 “어떠한 운명의 공동체도 존재하지 않는다”2)고 설명한다.
우리가 사진에 기대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구체적인 명분이나 의미 이전에 어떤 과시로 나타난다. 자신이 어디에 갔는지, 누구와 함께 있는지, 무엇을 먹고 보았는지를 증명하는 수단이니 말이다. 이 경우에 속한 대부분은 사람들은 사진이 지시성과 이미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특권(?)을 여전히 굳게 믿는 듯하다. 그렇다면 SNS에 등장하는 헤아릴 수 없는 수의 사진 이미지들도 위의 낡은 사진에 대한 믿음과 연결되어 있을까? 새로운 기술과 도구가 소통의 방식을 장악했다고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사진에 대한 이상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헤어진 연인의 사진을 보며 하염없는 아쉬움과 상실의 감정을 곱씹어보는 행위, 영정사진의 피할 수 없는 아우라의 직면은 랑시에르의 관점을 보면 ‘감각적인 것’에 대한 경험이다. 사진은 편견 없이 보이는 것을 기록한다. 그들이 아무리 허영심으로 가득 찬 주인이라 할지라도 무시하거나 조롱하지 않는다. 촛불집회 장면이나 사회 불평등의 현장을 편견 없이 기록한 사진 이미지를 보고 우리는 자신의 이념이나 철학에 따라 반응할 것이다. 박형근이 자연을 초현실적으로 재현하는 이유는 그가 만들어내 이미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풍경을 닮았으되 전형적이지 않기에 생기는 ‘낯섦’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기이한 이미지는 보는 자들에게는 크던 작던 어떤 내적 갈등을 일으킨다. 일반적인 감각과 다른 감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랑시에르는 감각적 갈등이야말로 예술이 정치적인 행위라는 증거로 본다. 왜냐하면 감각적인 것의 분배가 질서에 맞지 않다고 지각하는 순간 우리는 다른 나눔의 방식을 고민해야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정치의 원의미인 민주주의에 다가가는 자세이다. 그리고 박형근의 사진은 랑시에르의 철학과 상당히 가까워보인다.
-정현 (인하대 교수), 2016
1) 자크 랑시에르 『역사의 형상들』, 글항아리, 2016, 6쪽
2) 같은 책, 22쪽